에바리스트는 수풀이 반쯤 언 안개 물을 먹고 자라는 새벽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때가 되는 일관성과는 달리 그 때의 행동거지는 제법 다양하다. 얕게 잔 잠에서 깨는 것이 일반적이고, 늦게까지 책상 업무를 하다가, 손 끝으로 체스말을 만지작거리다가, 집무실 바깥을 내려다보다 갑작스럽게. 그것들은 매우 불현듯 떠올랐다. 목숨을 받은 자가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는 주위에서 그것을 부정하고 삭제하려 드는 자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리고 무어를 그리 깊게 생각했는지 누군가가 묻는다면, 에바리스트는 구체적인 언어로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익힌 제법 난해한 수학 공식이나 엔지니어들이 머릿속에 이고 다니는 지식들도 기호와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만은 무리였다. 그것은 막연하지만 무겁고 감각적이기를 강요해서, 에바리스트는 점차 제국의 심부로 도달하고 있었다. 그 최근에 생겼던 일로, 아리스텔리아의 손에 쥐인 훈장을 받았다.
제국의 심부에 잠길수록 에바리스트의 생각들은 우후죽순으로 늘고 자라난다. 그리고 생각들이 가득 들어차 두뇌가 과부하 상태에 걸리면,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를 찾았다. 우선 그는 입속말로만 나직이 그 이름을 불렀다. 심장이 콩콩거렸다. 에바리스트는 그것이 제 심장박동 소리가 아니라 한 아이의 발소리임을 알아챘다. 아이는 조금 해진 갈색 신발을 신고 멜빵을 매고 있다. 유독 동그랗게 드러난 이마 아래의 커다란 눈이 파랗게 빛났다.
에바리스트의 시야가 전환을 일으켰다. 테이블, 커튼이 드리운 창문, 그 앞에 앉아있는 소년들. 어린 아이자크의 벽안에서는 언제나 호기심이 컵에 가득 담긴 물처럼 찰랑거렸다. 어린 에바리스트가 친구의 곁에서 내심 으스대며 체스판을 벌여놓는다. 상아를 깎아 만든 말이 테이블에 가득 쏟아졌다. 차르륵차르륵, 말들이 테이블 위를 구르는 맑은 소리와, 그보다 더 투명한 소년들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에워쌌다. 아이자크도 체스 해 볼래? 재미있어. 초보자니까 살살 해줄게. 에이……. 이런 걸로는 기를 써도 에바를 못 이길걸? 그치만 말은 정말 예쁘게 생겼다. 특히 이 말 모양 말이야……. 아, 아이자크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생긴 것도 멋지고 사용하는 방법도 되게 재밌어. 사실 제일 센 건 퀸이지만. 정말? 이상하다, 왕도 있는데 왜 여왕이 더 센 걸까? …….
에바리스트가 조금 더 가까이로 다가가 그 이름을 불렀다. 두 아이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에바리스트는 그 아이들에게 아직 제 목소리가 닿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에바리스트는 품 속 깊은 데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계가 2시 47분에서 막 벗어나 초침이 규칙적으로 짤깍댔다. 첨탑의 긴 그림자를 따라 걷는 걸음은 어느덧 나지막하게 아이자크 로스바르드의 관사를 찾고 있었다. 희미한 빛을 발하는 한 켠의 창문이 빛을 발하는 곳으로 걸어가는 에바리스트의 어깨 위로 가루눈이 떨어졌다.
옻칠이 슬슬 닳기 시작한 관사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침대에는 아이자크가 잠들어 있었다. 간단한 셔츠 하나만 걸치고서, 창문 쪽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워 있어 그의 등이 보였다. 마치 에바리스트가 들어올 것을 처음부터 꿰고 있었던 양…….
“이제 끝났냐?”
정정. 알고 있었다. 잠들지도 않았고 말이다.
벽과 천장에 이리저리 반사된 목소리가 썩 공허하게 울리었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심상하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에 반쯤 잠기가 섞여있었다.
“조만간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걸. 황비 폐하께서 보시고 아이고 이게 내가 알던 바르트 준장이 맞으신가 하고 난리를 치셔도 내 탓 아니야. 책임은 준장님께 있습니다-.”
“시답잖은 소리는 그 쯤 해둬. 불만이 있으면 늘 말했잖아, 내 얼굴을 보고 똑바로 말하라고.”
“나 참. 없는 할 말을 지어내라고 하면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사실만을 열거할진대 그 속에 함유된 빈정거림을 읽어낸 에바리스트의 말 끝에는 한숨이 깃들었다. 쾌활하고 수더분한 인상을 주는 용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이자크는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방향으로 최대한 대화를 비꼬는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에바리스트가 유일하게 감내하기 힘든 선을 건드려 빈정거리곤 했다. 이해 받고 싶었던 마음이 부정당하고 이어지지 않는 대화는 제멋대로 굳어버려, 형체조차 손끝에 선연히 전해지지 않는 감정을 엉망으로 짓누른 채 에바리스트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게 어언 석 달째에 이르고 있었다.
“오지 마. 향수 냄새가 진하네.”
침대로 향하던 구둣발 소리가 움찔 멈췄다. 에바리스트는 코트 자락을 잡고 옷 안쪽의 냄새를 맡았다. 눈의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라일락 향이 불투명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이걸 또 저렇게 떨어진 거리에서 알아차리고 경계를 긋는 모습이 꼭 주먹만한 똥강아지를 연상시켰다. 아이자크의 말을 무시하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흘깃, 뒤로 돌아누운 고개가 움찔거렸지만 그게 다였다. 에바리스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싫다고 말할 줄이나 알지 제대로 거부를 한 적이 있나.
“그녀와의 관계 때문에 그래?”
“…….”
“아니면 전에 기술을 쓴 것 때문에?”
“…미친. 그 정도로 내 속이 월세방 사이즈인 줄 아냐.”
“아이자크.”
그제야 아이자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격하게 뒤를 돌아본 탓에 베개에 이리저리 마찰당한 금발이 부스스했다. 뜻밖에 그의 두 눈은 평온했다. 전격을 썼다며 순식간에 앙칼진 기색을 품던 눈, 황비가 머물고 있을 첨탑을 노려보는 예리한 눈이 그 위에 차곡차곡 겹쳤다.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키는 몸의 동세에서는 기이한 괴리가 느껴졌다. 에바리스트는 전장에서 적들의 혼을 쏙 빼놓는 그의 민첩함이 과하게 눈에 익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한테 할 말이 없냐고 물었지?”
“그래.”
“깜빡 잊고 있었는데, 생각났어.”
아이자크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꺼낸 물건을 에바리스트의 손바닥에 올렸다. 차갑고 조금은 묵직한 철의 조각, 말의 머리모양.
“나이트구나.”
“너 오늘 생일이었으니까.”
“그랬던가.”
“황비 폐하께서 안 챙겨주시디?”
“말이라고 해?”
“나라도 챙겨줘서 다행이구만. ……할 말 다했으니까 너도 돌아가서 자. 네가 시킨 일은 실수 없이 처리했으니까 걱정 말고. 피곤해죽겠으니까.”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댄 아이자크의 얼굴과, 손의 나이트를 에바리스트는 번갈아보았다. 며칠 간의 일정이 제법 분주했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주 사실은, 에바리스트는 알고 있었다. 본디 그란데레니아 제국의 눈의 달 23일은 외롭고 추운 날이라는 것을. 아이자크가 챙겨주지 않았다면, 에바리스트가 기억을 하고 있었더라면 말이다. 그것에 대해서 에바리스트는 딱히 섭섭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에바리스트의 23일째의 눈의 달의 의미는 두 명만이 알고 있지만, 에바리스트는 한 명이라도 더 알고 있으니까 됐다고, 늘 그렇게 생각한다. 그 이상의 의미로 부풀릴 생각은 없다.
에바리스트는 조금 오래도록 아이자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파란 달빛과 창가를 점점이 찍어누르는 하얀 눈송이의 빛이 흰 피부에 내려앉아 조금 더 고되게 보였다. 적잖게 불편해하고, 띠꺼워하는, 한 쪽밖에 남지 않은 벽안은 요즘 거짓말을 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목구멍 안쪽으로 할말을 꾹꾹 눌러 찍고 있으면서 할 말이 없다고 하며, 책상업무 재미없지, 하고 가만히 물으면 씨익 웃어보였다. 그런 아이자크를 바라보는 에바리스트의 체내 심장은 천천하게 하강한다. 그것은 낙하할 때마다 조금씩 회빛으로 바뀌어서, 어느 순간 뭔지도 모를 바닥에 부딪혔을 때 딸강, 하는 무게감 있는 소리를 냈다. 그 바닥에 서서 강철로 된 심장을 부여잡고 에바리스트는 오르고, 또 올랐다. 세계의 정점과 삶의 끄트머리, 모든 명예와 권력의 뒤에서 아이자크가 앉아 있었다. 작은 체스말을 손에 꼭 쥔 채로, 앙증맞은 멜빵 바지를 입고 한 쌍의 벽안을 깜빡거리며.
나는 네가 말해주기를 기다려. 나는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고 반박하는 순간을,
소용없는 건 우리 다 알고 있잖아, 아이자크. 넌 머리 좋은 애니까…….
에바리스트의 손바닥이 아이자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에바리스트의 눈동자 속으로 시큰둥한 벽안이 가까이 빨려들어갔다. 눈꺼풀에 매달린 금색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뭉근한 입맞춤을 퍼붓는 얼굴을 응시하던 아이자크가 지친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더운 숨과 타액이 이어질 무렵에 아이자크는 조금 쉰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생일 축하해, 에바.”
“그래. 고마워.”
아이자크의 손끝이 에바리스트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었다. 순순히 떠밀려간 에바리스트의 코트 안쪽에는 어느덧 군견의 체취가 가득 들어찼다.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공기를 둘러싸고 대기를 냉혹하게 억눌렀다. 에바리스트의 손 안에 쥐어진 철의 나이트처럼 묵직하게.
눈의 달 5일, 개(Dog)의 날
안개의 달 17일, 물냉이(Watercress)의 날
안개의 달 17일, 물냉이(Watercress)의 날
열매의 달 19일, 천수국(Mexican Marigold)의 날
꽃의 달 3일, 양치식물(Fern)의 날
새싹의 달 4일, 튤립(Tulip)의 날
생기를 지님과 동시에 생기를 빼앗는 식물. 그 식물의 꽃잎은 보기 아름다운 선홍빛. 사람의 피을 차갑게 시린 하얀 눈과 부드럽게 섞어서 빚어 놓은 듯 한 고운 자태. 꽃잎이 바랠 때 까지 당신의 정원에서 이지러지도록 피어나라. 피어나고, 흩뿌려지고. 그리고 져 버리는 꽃잎이 아쉬워 당신이 꽃 잎 대신 풀 잎을 따서 입에 물었을 때에는 이미 꽃 잎과 함께 운명을 달리 할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인형의 마음이 점점 사람에 가까워 진다는 것에 있었다. 코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의 모습보다는 아직 기계에 가깝던 시절. 처음으로 붉은 꽃을 꺾었던 인형은 한참이나 그것을 들여다 보았더랬다. 그리고는 꽃잎을 하나하나씩 때어내어서 손 끝으로 문질러 짓이겼다. 붉은 꽃잎에서 붉은 즙이 인형의 손가락 파츠에 스며들었다. 인형은 한 동안 제 몸에 남겨진 붉은 자욱을 지우지 않고서 그대로 놓아두었다. 어쨌든, 인형은 사람의 행동과 감정을 습득해 나가는 중이었고 꽤나 그럴듯하게 닮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형은 인형이다. 사람 흉내를 '잘' 내는 인형. 코브는 그것이 싫었다.
탐색 중 너른 사막에서도 깊은 낭떠러지가 있는 협곡을 지나던 길이었다. 텁텁한 모래바람이 부는 그 곳에는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라고는 피어 날 일이 없는 사막. 입안에 굴러다니는 모래먼지를 연신 퉤 뱉어내며 코브는 전사들의 선봉에 서서 걸었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강했기에 콥이 그것들을 도륙하면서 무기를 잃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인형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좋아해요."
한참을 말없이 걷는데 인형은 코브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 뭐라고 대꾸했던가. 코브는 무심한 얼굴로 싫다고 했었다. 인형 주제에. 건방져. 어쩌면, 아마 그런 식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코브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음으로. 그 뒤로 한동안 상처 받은 얼굴 표정을 흉내내며 인형은 말이 없었다. 상처받았을 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전사들과 어콜라이트들은 인형을 아끼고 좋아했으며 사랑했다. 코브는 제가 한 발언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어차피 인형은 인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몇 주 동안 그들은 말없이 다소 어색한 사이를 유지하며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데 주력했다. 그들이 사이가 좋던 나쁘던, 어쨌거나 그들은 무사히 인형이 머무르는 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성에 돌아오고 나서 부터 인형은 코브와 어울리는 일을 꺼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콜라이트의 한 명이 코브를 부르는 것이다.
아가씨께서 코브씨를 부르십니다. 정원으로 오시지요.
인형의 정원에 가기 위해서는 5미터에 달하는 크리스탈 같은 유리문을 활짝 열어야만 한다. 문을 넘고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녹음의 짙은 향기와 꽃향기가 풍긴다. 인형이 성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이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인형은 탐색을 위해 성 밖으로 나가거나 잠(이라고 부르지만 의식을 오프시키는 것에 가까운)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눕는 일 이외에는 정원에 머물러 있곤 했다. 코브는 인형의 정원 한 가운데에 아담하게 차려진 테이블을 먼 발치에서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꽃 식물 줄기의 패턴이 여러 번 반복되어서 새겨진 고급스러운 테이블 다리 아래에는 이끼가 구름처럼 피어나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인형이 데리고 있던 전사들 중 한 명이 직접 뜬 레이스 탁자보가 깔려있었다. 아인 이라고 했던가. 그 고양이 여자. 코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테이블과 세트로 보이는 의자가 3개. 의자에도 마찬가지로 레이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있었다. 여튼 인형은 쓸모없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인형의 성, 인형의 정원에는 여러가지 식물이 다양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이 것들을 관리하는 것은 주로 어콜라이트의 몫이었다. 사실 이 세계에서 해 같은건 떠 있지 않지만서도, 정원에 들어서면 봄햇살같은 햇빛만이 쨍하며 내려쬐는 것이다. 마치 이공간처럼. 그렇기에 식물은 탐욕스럽게 햇빛을 받으며 잘 자랐다. 휘어감을 수 있는 곳은 모두 타고 올라가며 제 잎사귀로 그악스럽게 뒤덮는 모습을 코브는 눈살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인형은 꽃을 좋아했다. 노란꽃, 하얀꽃, 푸른꽃. 게 중에서도 붉은 꽃을 가장 좋아해서, 인형은 항상 똑같은 붉은 생화를 꺾어서 귓가에 꽂고 다녔다. 루드는 정원을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정원 일을 거들겠다는 인형을 말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형은 그들의 주인이요, 귀여운 아가씨였으니까. 물론 코브에게는 아니였지만.
인형 주제에.
코브는 저도 모르게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말대로다. 인형 주제에. 코브는 인형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혐오하는 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사람처럼 움직이고 말하면서, 전사들에게서 표현되는 사람의 감정을 조금씩 배워나가 사람의 행동을 하는 그 것. 인형은 그저 인형일 뿐인데. 인형주제에.
인형의 성은 다소 조용했다. 인형이 이 세계를 탐색하고서 성에 돌아오면, 전사들은 방 안에서 조용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제 취미 활동을 하곤 했다. 코브 또한 인형이 정원으로 부르지 않았더라면 제 몫으로 주어진 방 안에서 누워 낮잠을 잤을 것이다.
"티타임입니다, 아가씨."
싹싹하게 웃으며 은쟁반에 뜨거운 홍차가 가득 담긴 주전자와 찻잔을 가져오며 브라우는 웃었다. 그가 부르는 소리에, 깔끔하게 정리된 풀 숲에서 인형이 바스락 거리며 제 머리를 내밀었다. 귓가에는 어김없이 붉은 생화가 꽂혀진 상태로 그것은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저번 탐색 이후로 꽤나 오랜만에 보는 인형의 얼굴은 좀 더 사람과 가까워 져 있었다. 특히 표정이. 코브와 눈이 마주치자 그 것은 바스락 거리며 수풀을 해치고 나와 인형은 코브의 손가락을 잡아 테이블로 이끌듯 힘을 주었다. 코브는 제 손가락을 잡고서 낑낑거리며 저를 테이블로 데려가려는 인형을 꿈쩍 하지 않고, 일부러 가만히 서서 내려다 보았다. 인형의 표정은 다소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코브. 코브. 테이블에 빨리 앉아줘요."
"귀찮게시리."
"당신에게 줄 것이 있어요."
인형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리키며 빤히 올려다 보았다. 머리카락에는 붉은 꽃잎과 함께 덤불같은게 어지러이 묻어있었다. 코브는 한숨을 나직하게 쉬며 인형이 이끄는 데로 테이블에 털썩 앉아주었다. 어쨌거나, 인형은 코브의 인도자 이기도 했다. 비록 그가 인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의 앞날을 위해서 인형의 비위에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더군다나 선물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이 테이블에 앉자, 브라우는 찻잔을 양 쪽에 놓고 붉은 액체를 천천히 따라 주었다. 향긋한 향이 코 끝을 가볍게 간질였다.
"브라우. 주세요."
"예. 아가씨."
인형의 말이 끝나자, 브라우는 제 품에서 가죽집에 감긴 단도를 꺼냈다. 인형은 그것을 코브에게 내밀었다. 익숙한 감촉의 것이었다. 코브는 군말 하지 않고서, 그것을 받아 들고는 이리저리 가볍게 매만졌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의 조각에서 이 나이프를 사용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 코브의 표정을 보면서 인형은 다시 한번 웃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기억 속에 있던 형상을 바탕으로 만들었어요. 잘 사용해주길 바래요. 당신, 저번 전투 때 무기를 모두 잃어버렸으니까요."
인형은 제 몫의 홍차를 천천히 머금었다. 코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을 잘 갈무리해 허리춤에 매달고서 인형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를 위해서 주는거라는데 딱히 싫어할 이유는 없다. 코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코브는 인형의 머리에 꽂힌 붉은 꽃을 빼 냈다. 인형의 의아한 눈빛이 손 끝에 매달린 꽃을 향해 따라붙었다.
"이게 뭐가 좋다고 매일 달고 다니는거냐."
"예쁘니까요. 이건, 제가 가지지 못한 생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예요."
"하긴. 넌 인형이니까."
"...생명이라는건 무엇일까요. 당신도 지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으시겠죠. 기억 속의 그 곳으로."
줄기에서 꺾인 생화가 아무리 싱싱해도, 곧 그 생기를 잃을 것이다. 죽어가는 꽃을 매일 꺾어서 머리에 장식하는 살아있지 않은 인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코브는 손으로 꽃을 뭉갰다. 꽃잎이 짓이겨지면서 붉은 즙이 손 끝에 묻었다. 꽃잎을 버리고 아무렇게나 손수건에 손을 문질렀지만 불그스름한 기운은 가실 줄 몰랐다. 짜증나. 다소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어보이는 코브를 향해 웃는 듯한 표정을 인형은 다시 한번 지어보였다.
"조심하세요. 독이 있답니다. 사람을 죽일 만큼 치명적인 독이래요."
"뭣,"
"농담입니다. 하지만 정말이예요."
인형은 남은 홍차를 모두 호록 마셨다. 티타임은 끝났다. 이제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라는 인형의 말에 따라 코브는 제 방으로 돌아왔다. 기껏해서 한다는 말이 그런건가. 지겨웠다. 하루하루가 불어나는 꽃잎처럼 길었다. 빌어먹을 기억은 돌아오지 않고, 인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벗어나기엔 껄끄럽다.코브는 제 얼굴을 느즈막히 쓸어내리다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손 끝에 물든 선홍빛 물은 오래도록 코브의 손 끝에 남아있었다. 자꾸 손 끝이 찌르르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 손에 착 감기는 나이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코브는 눈을 감았다. 좋아해요- 라고 했던 인형.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인형이다. 조금 졸렸다. 그는 하품을 몇 번 하다 이내 잠이 들었다.
코브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있다. 그것은 코브 뿐 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전사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한다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기억을 칼로 댕강 썰어 낸 것 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기억을 되 찾지 못한 전사도 있지만, 진실의 일부를 알게 된 전사들도 있다. 코브는 그런 전사들 중 하나였다. 불행한 유년 시절. 언뜻 보이는 마도의 뒷골목. 더러운 조직 인간. 코브로써는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폴로라이드 사진처럼 뇌 속에 박힌 이미지가 팔랑거리며 스쳐지나갈 때가 있었다. 꿈처럼, 흐릿하고 일그러진 영상. 분명 외곡 되어있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조직에 속해있던 사람들 중에는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총살, 흉기, 교살, 독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 중, 독살을 즐겨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대나무 풀잎 같이 얇고 길죽한 잎을 코브에게 들어보였다.
-이거 한 달 달여 먹이면 사람 골로 가는 것도 시간문제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거야.
-뭐야, 그 풀 쪼가리는.
-협죽도라는 거다. 빠른 효과를 보고 싶으면 잎을 짓이겨서 칼에 발라도 좋고.
꽃은 참 예쁜데, 잎이 독한 년이지. 그 말을 끝으로 코브는 잠에서 깨어났다. 선잠이 들었던건가. 조각나고 불안정한 기억은 드문드문 꿈 속에서 반복되고, 선명하게 각인된다. 협죽도. 코브는 꽃의 이름을 되뇌었다. 협죽도. 인형이 꽂고 다니던 선홍빛 꽃. 생기를 지님과 동시에 생기를 빼앗는 요물 같은 식물. 코브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기약 없이 기억을 되 찾기를 기다리며 부활 만을 바라보던 그에게, 심심하던 찰나 재밌는 생각이 나서 이다.
이른 아침의 인형의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코브는 제 키의 3배에 달하는 문을 열고서 인형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기묘한 장소. 코브는 인형이 선물해 준 나이프를 꺼냈다. 그것으로 인형이 가장 좋아한다는 식물의 줄기의 끝 부분을 잘랐다. 줄기는 버리고, 잎을 훑어낸다. 선명한 녹색의 잎이 까 뒤집어지면서 늘어지는 것을 모아 주머니에 갈무리 해 넣었다.
잎을 짓이겨서 즙을 모으면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요, 그 잎을 달여 마시면 눈알이 타 들어가는 듯 아파지고 발작이 일어나 결국은 목숨을 잃는다 하더이다. 사실 독살은 취향이 아니지만 이런 방법도 재밌을 것 같다고 코브는 생각했다. 모처럼 기억해낸 기억의 파편이니까. 인형이 마시는 차에 잎을 넣을 것이다. 인형이니 죽지는 않겠지. 설령 엄한 사람이 먹는다 하더라도 죽지는 않을테니까. 어차피 이 세계에서 죽는 것이 허락 된 자는 없다.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라면 더더욱. 인형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협죽도의 붉은 꽃은 생기를 머금었는데, 푸른 잎사귀는 생기를 앗아가더라. 붉은 꽃을 귓가에 꽂고, 잎을 달인 차를 마시며 죽어가는 인형. 그가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는 그렇게 사람에 가까워 지고 싶으면 기쁨과 행복 뿐만 아니라 고통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코브의 삐뚤어진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열매의 달 21일, 와일드 로즈(Wild Rose)의 날
열매의 달 30일, 광주리(Pack Basket)의 날
목초의 달 18일, 개양귀비(Poppy plant)의 날
서리의 달 18일, 담쟁이덩굴(Ivy)의 날
그 아이는 새끼 손가락 걸기를 참 좋아했었다.
한참 동안 달콤한 잠에 흠뻑 빠져있다가 일어난 직후처럼, 제대로 뜨여지지 않는 눈을 둔하게 깜박거리다가 루디아가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그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그 아이가, 누구였지? 스스로 떠올린 내용에 대해서 의아해하면서 그림자의 여검사는 꿈가루가 함뿍 묻어있는 것처럼 자꾸만 아래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위로 들어올렸다. 깜박깜박. 남아있는 잠을 털어내려는 듯 몇 차례 눈을 깜박거린다.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에 주변의 풍경이 이지러진 채로 흘러들었다.
한 줄기 빛이 아직 현실감각을 찾지 못한 그녀에게로 쏟아져내렸다. 옅게 신음하면서 루디아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풀려있던 눈동자가 생기를 되찾는다. 접시가 깨지면서 파편이 흩어진 것 같은, 그런 조각조각의 하얀 구름들이 흩어져있는 넓고 푸르른 하늘이 크게 뜨여진 눈동자에 비쳤다. 한없이 넓은 하늘 아래에는 그만큼이나 광활하게 뻗어있는 초록빛 목초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자신이 풀잎 무성한 야트막한 언덕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루디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어라?”
자신이 왜 여기에 앉아있는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으며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분명 그녀는 빛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쓸쓸한 세계를 방황하던 중이었을 터였다. 현세의 그늘에 속한 그 세계에서는 푸른 하늘도, 초록색 대지도 존재할 수 없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루디아는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들어 자신의 코앞으로 들어올렸다. 살아있는 세계의 싱그러운 흙내음이 날까?
“언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를 알기 위해 흙의 냄새를 맡으려다가 루디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옹알거리는 아이 같은 느낌이 아직 완전히 빠지지 않은, 높으면서도 부드러운 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루디아는 흙을 집어들었던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흩뿌려지는 햇빛을 머금으며 한층 연하게 보이는 갈색의 머리카락. 흘러내린 머리카락의 끝자락에 살짝 가리워진 새하얀 목덜미 아래로 자그마한 몸을 감싼 하얀색 민소매 원피스가 보인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순하게 보이는 눈매 아래로 복숭아꽃잎을 연상시키는 분홍빛 눈동자가 빛난다.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있는 루디아를 향해서, 귀여운 소녀는 함박미소를 지어보였다.
“여기 있었구나. 언니, 여기를 좋아했지.”
“누구?”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상대를 훑어본다. 분명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루디아는 상대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상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정작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고 할까. 하지만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이 행동하는 루디아를 보면서도 소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루디아의 곁으로 사뿐사뿐 다가섰다.
“온화한 날씨, 평온한 풍경, 어떠한 걱정도 없는 자그마한 세계......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달콤한 꿈이네.”
“......”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디아에게로 시선을 맞춘 소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입가에 피어있던 미소가 티없이 환하던 색채에서 조금 씁쓸함이 감도는 느낌으로 바뀌고 만다.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소녀. 누구인지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루디아는 순간 그리움과 비슷한 감정이 자신을 천천히 물들여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지나가버린 옛날에 대한 덧없는 추억에 잠기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마냥 달콤함 속에 녹아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은, 언니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아아, 알고 있어. 그들이 날 가만히 놔둘 리가 없으니까.”
루디아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이는 틀림없이 루디아 자신이었지만, 입은 그녀의 의식에 의해서 움직인 게 아니었다. 그제서야 누구냐고 당혹해하며 물었던 말에 왜 소녀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는지를 깨닫는다. 지금 소녀와 대화를 하고 있는 루디아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도, 그리고......메리 너하고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루디아 언니......”
메리였던가. 그 이름을 한번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루디아는 소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한 이름이었던 걸까. 자리에 앉아있던, 이 세계에서의 루디아 또한 고개를 돌려 소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결코 즐겁지 않은 미소를 짓고 있던 입술을 비틀어서 억지로 쾌활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언제나 루디아 자신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도 이렇게 있었던 순간만큼은 영원히 남을 거라고 네가 말해줬으니까. 그렇지?”
“......응. 내가 언니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야.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래. 그거면 충분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입술은 억지로 곡선을 그리지만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그믐날 밤의 초승달에 어리는 쓸쓸함이 맺혀있었다. 잠시 그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루디아는 손을 들어올려 메리의 보드라운 뺨을 장난스럽게 매만졌다. 아우, 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소녀를 보며 킥킥 웃는다. 뺨을 살짝 부풀리고 루디아를 쳐다보다가, 무겁게 가라앉던 분위기가 풀린 것이 기쁜 듯 소녀 또한 따라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어느 순간, 어디에 있더라도 내가 항상 곁에 있어줄게. 나에게 언니는 가장 소중한 친구이니까.”
“네가 말하니까, 꼭 정말로 그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솔직히 기쁜데.”
“약속할게. 자아, 약속.”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 참 좋아했었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소녀의 자그마한 손가락을 보면서 루디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주 손가락을 걸어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그 곱고 여린 새끼 손가락. 자신이 손을 들어 소녀와 손가락을 마주 거는 것을 루디아는 지켜보았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자신이 손가락을 걸었었다는 사실을.
한순간 모든 빛이 사라진다. 빛이 사라진 세계에는 짙은 어둠과 그보다 조금 옅은 어둠으로 가득 뒤덮여 있다. 평온하게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대신 그저 텅 빈 검은색만이 자리잡고 있는 하늘을 루디아는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싱그러움 가득한 언덕 대신 무너져 가는 폐허의 구석에 앉아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정신이 들었어?”
소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고개를 돌려 루디아는 상대를 쳐다보았다. 눈꽃이 내린 듯한 백색의 부츠와 미니 스커트, 케이프를 두르고 있는 자그마한, 정말로 자그마한 인형. 유리구슬처럼, 혹은 답게 반들거리는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는 것을 루디아는 볼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자그마한 존재를 보며 비어있던 의식을 되찾는다.
“지시자......”
“뭔가 기억을 되찾은 것 같던데, 그게 무리였던 건지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있었어. 걱정했었단 말이지.”
“......그런가.”
“뭐, 일단은 좀 쉬고 있어. 곧바로 다시 출발하진 않을 생각이니까. 난 다른 애들에게 말하러 갈게.”
손목의 관절을 까닥이며 손을 흔들며 인형은 천천히 그녀로부터 멀어져갔다. 인형 나름의 배려라는 것일까. 언젠가부터 자신들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이 되고 만 인형에 대해 루디아는 옅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되찾은 기억, 그 짧은 꿈에 대해서 생각한다.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 언제까지나 친구이니까.
“......응?”
옆으로 비스듬하게 내뻗고 있던 오른쪽 손의 새끼 손가락에 무언가가 걸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손가락을 걸었던 기억의 파편이 잔향처럼 남아있는 걸까.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있었던 것인지 녹슨 기계마냥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천천히 움직여서 손을 앞쪽으로 끌어온다.
그녀의 새끼 손가락에 얇고 섬세한 담쟁이 덩굴의 끝자락이 수줍은 듯이 휘감겨 있었다. 폐허의 벽면을 타고 내려오던 덩굴의 끝자락인 것일까. 길쭉하게 이어진 덩굴은 마치 여검사에게로 손을 내뻗어 손가락을 마주 걸어준 것처럼 보였다. 꼭 여검사가 되찾은 기억의 단편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것처럼.
담쟁이 덩굴은 우정을 상징한다고 해요. 서로 굳건하게 이어져서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꿈결에서 들은 적이 있는 듯한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던 것을 루디아는 어렴풋하게 떠올렸다. 그게 진정 자신의 기억인지, 아니면 그저 달콤하게 녹아드는 꿈인지 알 수 없었지만, 루디아는 자신의 손가락에 휘감긴 덩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친구가 바로 곁에 있어주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루디아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아이는, 메리는 새끼 손가락을 걸기를 참 좋아했었다. 여검사가 그 사실을 온전히 기억해낸 순간, 그녀의 손가락을 살포시 휘감았던 덩굴 자락이 스르륵 풀어져 내렸다.
포도의 달 8일, 아마랜스(Amaranth)의 날
소녀의 시간은 이곳에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조각조각 단편난 세계.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곳은 무언가를 기록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지금 그녀들은 들판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른 하늘이었지만 이전에 있던 다른 곳보다 월등히 걷기 좋은 환경에 표정이 살짝 풀어져 있었다. 앞에서 루디아가 선봉을 이루고 있었다. 메리는 그녀의 그림자 뒤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들을 앞으로 인도하는 지시자라 불리는 인형이 잠시 멈춰 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
“응?”
인형의 머뭇거림과 동시에 루디아와 메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인형은 쪼그려 앉아 자줏빛 꽃 군락을 쳐다보고 있었다. 엉덩이를 붙들고 앉아있는 모습을 찬찬히 쳐다보던 루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마란스잖아? 이런 곳에도 꽃이 피어있을 줄이야. 항상 괴상한 촉수식물만 가득하더니.”
“아마란스..?”
“그러고보니 메리의 탄생화였지?”
루디아의 말에 메리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으쓱했다. 루디아는 메리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어주면서 말을 이었다. 나이를 넘어선 친구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메리는 어린 아이였다. 이런 소리를 하면은 또 다른 전사가 똑같은 꼬맹이 아니냐면서 타박할 소리였지만.
“저 식물 이름이야. 예쁘지? 지시자?”
인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인형은 자색의 꽃잎을 만지고 있었다. 메리 또한 호기심이 일어 인형의 곁으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커다란 줄기가 높게 뻗어 있었다. 뜨거운 볕에도 불구하고 자줏빛 꽃잎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정정하자면, 그 볕에 의한 자줏빛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다. 루디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나무. 아니 나무같지만 풀인데. 어떤 곳에서는 신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꽃이야. 시들지 않고 남들을 도와 주는 식물이래. 계속해서 피어있는 영원불멸의 꽃이라나.”
메리는 가만히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꽃잎을 만졌다. 자신의 키만한 아마란스는 햇볕을 맞으며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섞여들어왔다. 메리는, 자신의 탄생화라고 했지만 자신보다는 그 사람과 더 어울리는 꽃이라고 한순간 생각했다. 빛바랜 망토 사이로 건넨, 자신을 구해 주었던 단단한 손을 메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 자신이 잡고 있는 꽃잎이, 잎사귀가, 그 사람이 내밀어 주었던 손만 같았다.
“불멸..”
메리는 중얼거리며 그 의미를 곱씹었다. 죽지 않는 것. 죽지 않는 사람. 멍하니 빛나는 메리의 눈동자에 아마란스가 비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영화의 단편처럼, 그녀의 머릿속으로 기억의 단편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 속의 남자는 웃으며 메리를 달래고 있었다. 자신을 붙잡아주었던 단단한 손의 주인이었다. 단편 속에 피투성이 남자는 자신을 끌어안고 울면서 웃고 있었다. 심장이 뽑혀도 죽지 않는 사람. 불멸자. 자신의 은인.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다정한 울림으로 자신을 불러주던 그 사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퍼지는 듯 했다. 괜찮니. 라고 자신을 쓰다듬어주던 손길. 아주 그리운 울림이었다.
“..리. 메리? 어디 아파?”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메리는 깜짝 놀라 루디아를 쳐다보았다. 루디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물가에 내려놓은 아이를 보는 어머니의 시선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던 메리가 왜 그러냐고 물으려고 하자 인형의 손이 먼저였다.
“아.”
어째서일까. 메리는 울고 있었다. 인형은 메리의 눈물을 닦아주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괜찮아요? 메리는 즉답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눈물을 닦아내며 웃었다. 우선 두 사람의 반응을 진정시켜야 했다. 메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앞의 꽃처럼 자줏빛으로 빛나는 말간 웃음이었다.
“그게, 잘은 모르지만. 이 꽃을 닮은 사람이 있었어요.”
한순간, 루디아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웃으며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아주 가끔씩 메리는 저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건 가만히 앉아 있었을 때였고 무언가를 보고 말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네 탄생화를 닮은 사람이라. 그럼 그것대로 연분은 연분이로구나. 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있었다.
흠뻑 젖은 듯한 습기찬 공기와 눅진한 바닥의 감촉을 느끼면서 눈을 떴을 때, 그림자의 여검사가 맨 처음 본 것은 나지막한 돌천장이었다. 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둑한 공간은 갑갑함이 느껴질 정도로 비좁았다. 틈새를 따라 흐르는 수맥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일까. 자신이 어두운 굴의 좁은 구석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축축한 물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바닥을 짚으며 루디아는 상체를 일으켰다. 체격이 작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천장이 어찌나 낮은지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 천장이 닿을 정도가 되어버린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것일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입구로부터 흘러드는 한 줌도 되지 않을 빛을 눈으로 쫓으며 루디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 스스로 이런 은신처로 숨어드는 일은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긴 것은 꽤나 예전의 일. 어렴풋하게 넓은 개활지를 필사적으로 달리던 일만 떠오를 뿐, 그 외의 일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라?”
희미한 빛에 의존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루디아는 자신에게 케이프 자락이 둘러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은 군청색, 안쪽은 붉은색을 띄고 있는 케이프는 군데군데 얼룩이 지기는 했지만 꽤나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동굴 내부에 흐르는 한기로부터 여검사의 몸을 지켜주려는 듯 마치 값싼 포대처럼 덮여있는 그 물건은 분명 루디아의 물건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을 때였다.
“으윽!”
갑작스럽게 신경을 찔러대는 듯한 통증이 바닥을 짚고 있던 팔 전체에 퍼져나갔다. 지탱하던 팔에 힘이 빠지면서 옆으로 비틀, 몸을 흔들고 만다. 가까스로 옆으로 엎어지지 않게 몸의 균형을 맞추고선 루디아는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를 악물어 참으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자신의 팔에 자상이 새겨져 있음을 그녀는 알아차렸다. 상처 부위를 따라서 검붉은 피가 잔뜩 엉겨붙은......
“무리하시면 상처가 덧나게 됩니다. 잘 아시겠지요.”
“누, 누구?”
간신히 신음을 삼킨 순간 나직하게 동굴 내부에 울린 누군가의 목소리에 루디아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끊어질 듯 가는 빛이 흘러들던 동굴의 입구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 그 그림자의 끝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른 이의 존재를 깨닫자마자 루디아는 반사적으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대상, 자신의 얇고 섬세한 검을 찾아 손으로 주변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만져지는 것은 오로지 옅은 물기를 머금은 돌바닥 뿐, 생명과도 같은 분신의 존재는 손에 닿지 않는다. 당혹스러워하는 루디아를 잠시 쳐다보고 있다가 동굴 입구에 서 있던 이는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공동에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울려퍼진다.
“검은 머리맡에 두었습니다.”
단순히 사무적이라는 표현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 감정이 섞이지 않은 듯한 차가운 목소리. 보통 목소리를 들으면 말하는 이의 표정이 어떠할 것인지 대충 떠올릴 수 있는 법인데, 그러한 상상이 무의미할 정도로 상대의 목소리는 텅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무표정하다. 그런 감상 밖에 떠오르지 않을 목소리였다.
상대의 말에 따라 몸을 비틀어 머리 위쪽으로 손을 뻗는다. 검집에 곱게 잠든 상태로 있는 자신의 무기를 붙잡고는, 루디아는 마치 소중한 보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검을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적의 가득한 눈동자로 곁으로 다가온 상대를 노려본다. 상처입은 맹수와 같은 눈을 하고 있는 루디아를 상대는 조용히 마주보기만 했다.
“너, 누구냐.”
“......해칠 의사는 없습니다.”
“누구냐고!”
날카로운 외침이 좁은 공간에 울려퍼진다. 그 울림이 잦아들 때까지 상대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의 순간 동안 루디아는 상대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시야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검보랏빛의 긴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 피어난 꽃의 꽃잎처럼 보였다. 그 머리카락 아래로 혈색 없이 창백한 하얀 얼굴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동굴의 그늘 속에서 그저 무표정함만을 일관하고 있는 그 얼굴에 황금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반짝이는 게 보였다.
“너도 내 목을 노리고 따라다니는 녀석인가?”
억지로 짜내는 듯한 표독함을 묻혀서 말을 내뱉는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여성이라는 사실에 긴장을 풀 정도로 루디아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지내온 지옥도 같은 삶에서는 무엇이든 의심을 해야만 했으니까. 그런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루디아를 쳐다보다가, 검보랏빛 머리카락의 아가씨는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제 목적이 당신의 목이었다면 그 목표는 한참 전에 이루었을 터입니다.”
움찔, 어깨를 떤다. 그러고보니 자신은 쭉 의식을 잃은 상태였었다. 현상금 사냥꾼이었다면 얼마든지 손쉽게 목적을 달성했으리라. 그 사실을 깨닫고는, 루디아는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던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 반응에 안심을 한 것일까. 벽을 등지고 숨듯이 앉은 채로 몸을 움츠리고 있는 루디아에게로 상대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는 구겨진 채로 바닥으로 떨어진 케이프를 집어든다.
“......날 구해준 건가?”
케이프를 한번 툭툭 털어낸 다음 자신의 어깨에 두르는 상대를 쳐다보며 루디아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음을 던졌다.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몸 위에 덮혀있었던 케이프가 상대의 것이라면, 자신을 보살펴준 것 또한 지금 마주하고 있는 아가씨라는 말이 되니까. 그렇게 말을 던지고서 루디아는 쓰러지기 전, 자신이 쫓기고 있던 때의 일을 보다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분명, 한 차례 세찬 검격에 당하고는......
“그렇게 불편하게 앉아계시면 상처가 한층 악화되게 됩니다. 근육에 불필요한 힘을 넣지 않도록 하십시오.”
마치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루디아의 손을 잡아끌어 바닥으로 눕히는 여성. 아래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이 살짝 루디아의 뺨에 닿아서 피부를 간질였다. 가까이로 붙었을 때 루디아는 상대가 수녀 복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겉에 두른 케이프 아래로 경건한 수녀복이, 검보랏빛 머리카락 위로는 각이 잡힌 수녀모가 자리잡은 것이 보였다.
무엇 때문에 자신을 구해준 것일까. 상대가 자신에게 살의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자마자 루디아는 그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저 목숨을 위협받으며 쫓기는 몸. 누구도 얽히고 싶어하지 않을 지독한 수렁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신세이니까.
“왜 나를 도와준 거지?”
“상처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만, 방치해둔다면 분명 점차 악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응급처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디아의 물음은 못 들은 것처럼 가볍게 무시하고는 자신이 할 말만 일방적으로 해버린다. 조금 골이 나서 그 차가우면서 아름다운 얼굴을 노려보다가, 루디아는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라고 묻는 듯 마주한 눈을 두어번 깜박거리고는, 수녀는 여검사의 팔을 상처 부위가 드러나도록 자신의 쪽으로 들어올렸다.
어디서 준비해서 온 것인지 작은 통을 꺼내 거기에 담긴 물로 상처를 천천히 씻어내린다. 엉겨붙었던 피가 흘러내리면서 고운 피부 위에 흉하게 새겨진 상흔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갑을 낀 자신의 손등으로 물기를 슥슥 닦아내고는, 수녀는 품 속에서 헝겊으로 싸여진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바깥 바로 앞쪽에 모예화가 수도없이 많이 피어있더군요. 덕분에 연고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피부에 심한 가려움증을 유발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견뎌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열기로 잎과 줄기의 숨을 죽일 방도가 없었으니까요.”
“모예화라는 건......”
“......우단담배풀이라고도 하던가요.”
손수건이었을까. 그것으로 잎사귀를 감싸고 묶은 뒤 으깨서 고약을 만들었을 거라고 루디아는 추측했다. 상대가 초록색 덩어리를 조금씩 떼어서 상처 부위에 바를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스며들다가, 곧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불쾌한 간지러움이 루디아의 신경을 자극했다. 어금니를 꾹 깨물고 루디아는 그것을 버텨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녀의 입가에 빙긋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예화는 자상 같은 상처에 바르는 고약의 용도로도, 기관지 계통의 질환을 가라앉히기 위해 직접 복용하는 형태로도 쓰일 수 있는 약재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독성을 머금고 있는 위험한 풀이기도 하지요.”
“......독성?”
“맹독은 아닙니다만 무시할 수는 없을 독을 머금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생명체는 기절시킬 수도 있을 정도의 마취 성분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마지막 한 덩어리까지 꼼꼼하게 상처에 발라주고는, 고약을 만드는데 사용한 헝겊을 팔에 붕대처럼 둘러서 묶어준다. 여전히 차가운 태도를 하고 있지만 어쨌든 자신을 보살펴주는 상대에게 루디아는 감사하는 마음을, 옅은 따스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준 이가 몇 명이나 되었던가.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불안하지 않다고 느낀 순간, 긴장이 풀린 루디아는 옅은 졸음기를 느끼고 말았다.
“제가 당신을 도와드리는 건......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야?”
“호의라는 것은 분명 친근하게 느껴지는 따스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저 그 자체의 순수함만 있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호의를 베푸는 이유, 라는 독기가 그 속에 같이 있을 터이니까요. 제 나름의 이유라는 게 당신에게는 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사르륵, 상대의 손길이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는 것을 루디아는 희미하게 느꼈다. 쌀쌀맞은 목소리와는 달리 그 손길은 부드럽고 기분 좋아서, 루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그 손길에 마주 부비고 말았다.
“......하지만, 거짓된 호의라도 당신에게 위안이 될 수 있었다면 그 나름 기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 이름은?”
“......”
짧은 침묵이 이어진다. 그 사이에 루디아는 자신의 의식이 한층 더 아래로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완전히 의식의 끈을 놓고 잠들기 직전, 나직한 중얼거림이 그녀의 귓가에 흘러가는 바람처럼 스쳤다.
“......모예화는 ‘자선’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지요. 저에 대해서는, 어쩌다 당신을 도와준 인연 정도로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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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커다란 풀이었다. 개중에는 2미터 가까이 되어보이는 녀석들도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는 아래쪽에 펼쳐져 있고, 그 위로는 마치 탑과도 같은 길쭉한 줄기가 보송보송한 솜털에 의해 감싸여진 채 높게 뻗어나간다. 우단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납득이 될 정도로 보드라운 솜털 사이로 손톱만한 노란색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을 루디아는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동굴 바로 앞에 자리잡은 작은 공터에는 우단담배풀......모예화들이 잔뜩 자라나 있었다. 옅게 바람이 밀려들 때마다 갈대풀들이 물결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로 그 길쭉한 줄기를 흔들어댄다. 촘촘하게 자라난 군집 사이에서 마치 동물의 털을 한 웅큼 뜯어낸 것처럼 비어있는 공간을 발견하고는, 루디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마도 약재로 쓰기 위해서 그 녀석이 그곳에 자라고 있던 풀들을 뜯어냈으리라.
다시 눈을 떴을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텅 비어있는 동굴의 구석에 앉아서 멍하게 있다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루디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곁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자신의 검을 집어들고는, 이미 떠나버렸음을 눈치채고 있음에도 루디아는 자신을 구해줬던 검보랏빛 머리카락의 수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꽃말이 ‘자선’이라고 했었나.”
결국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도움을 주면서도,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의 목적 때문에 도와줬음을 독을 머금었다는 표현으로 암시하던 수녀는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남기고 간 것은 오로지 초록색 풀물과 검붉은 핏물을 흠뻑 머금은 손수건 한 장 뿐. 자신의 팔에 묶여있던 그것을 풀어내서 손에 쥐고 있다가, 루디아는 얼룩진 손수건을 자신의 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만난다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겠지.”
설령 독기를 머금었다고 하더라도, 호의는 호의.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까. 어쩌다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때 손수건을 돌려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루디아는 태양이 스스로의 길을 따라 흘러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 자신도 다시금 길을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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